악랄하게 왜곡된 우리 건국 지도자 이승만.
좌파 사관및 전교조 사관에 의해 악랄하게 왜곡된 우리 건국 대통령
대한민국 국부 초대 대통령
우남 박사 이승만.
지난 70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나라인가
바로 자유민주공화국이며 한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통정부이고 물론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이다.
그럼 이 대한민국을 세운 주역 건국 최대 주역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자 국부인 우남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 운동가이며 건국의 아버지시다.
일본이 이나라를 강제로 점령한지 10여년만에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즉 일본의 한국 통치는 불법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탄생하였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한국은 엄연 독립국가임을 선포한것이다.
임시정부 초대 주석을 지낸 분이 바로 이승만 박사이다.
이승만박사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후 몇해뒤 그자리를 김구에게 물려주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후 미국 에 살던
동포들을 모아 한국의 독립과 반일 투쟁에 나섰고 미국 지도자들에게
한국인의 의지를 알렸다.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박사와 도산 선생 안창
호 등이 한국인의 자주 적 정신을 알렸고 미국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으며
이승만 박사의 명성은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고학력자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기독교인이 되어 하느님을 받들며
자유 민주 독립 정신을 발휘해온 지도자이다.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건국 주역이 되고 반공 반탁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을 세우
고 초대 대통령이 된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원체 그 명성과 지도력이 잘 알려진 인물로 초창기에는 좌우익을 막론
하고 그를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로 그 비중이 큰 인물이자 김구와 함께 민족 지도자
중에서도 최고의 두 거성이었다.
이승만 과 김구 는 그만큼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존경했던 동지였으며 민족진영은 물
론 전 민족 사이에서 이 두분을 능가할만한 지도자는 없었던것이다. 임정시절 김구에
게 주석직을 물려주고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 박사 그리고 그를 대신해 임정 지도자로
활약했던 김구 선생.
해방직후 38도선이 생겨 미 소 양군이 진주하게 되고 남한엔 미군이 북한엔 소련군
들어와 반도를 양분했다.
2차대전 직후 유럽의 독일역시 미 영 프 소 4개국이 분리 점령했고 결국 소련이 점령
한 동독이 후에 공산 체제가 들어서 나머지 3개 지역을 합친 민주국가 서독과 분단
대립하게 된것처럼 남한과 북한에도 결국 이질적 체제로 분단이 예고된것이다.
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꼭둑각시인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들어와 북한의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이는 소련의 절대적 지원하에 가능한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우두머리 겸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이때부터 그의 독재 즉 70년에 걸친 김씨 가문에 의한
독재가 막이 올랐다.
북한은 곧바로 이질적 공산체제로 바뀌었고 김일성의 독재가 시작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북한을 강점한채 사실상 북한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신의주 를 비롯 북한 각처에서 일어난 반소 투쟁은 바로 이런 소련의 침탈에 대한
항쟁이었다. 게다가 북한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민족 지도자로 삼아 반공 반탁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에 의해 짓밟혔다.
북한의 민주당 지도자 였던 조만식은 반공 진영을 규합 소련및 공산집단에 맞서 투쟁
했지만 공산군에 의해 진압되고 짓밟힌것이다. 게다가 38선으로 나라가 갈리자
북한에서 수십만명이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넘어와 남쪽 인구는 급속히 증
가 해방당시 1600만이던 남한 인구 (북한은 당시 900만)는 해외 교포의 귀환 및 북한
주민들의 남쪽 이주로 1949년에는 2천만을 돌파하게 된다.
(1967년 3천만 돌파 1983년 4천만 돌파 2005년 경 5천만을 돌파 2030년쯤 6천만예상 그리고 북한은 현재 2400만 추산).
이승만 박사와 한국 민주당 및 김구 계열 등 우익 진영( 민족 진영)과 공산당을 비롯
한 좌익 진영(공산당 혹은 그와 가까운쪽)으로 나뉘어져 대립한가운데
특히 남한 공산당 (박헌영이 주도)의 폭력 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당시 미 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를 믿고 있었다. 중도좌익인 여운형 계와 중도 우익인
김규식 계 가 좌우간 합작을 추진 후에 김구까지 이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승만 과 한민당 등 강경 우익 세력들은 반공을 외치며 좌익과 합작을 거부했고
박헌영을 중심으로 공산당 등 극좌세력역시 좌우 합작을 반대 했다.
그야말로 2000년대 남한내 좌우익 갈등을 보는것처럼 70년전 당시에도
좌익 우익으로 갈려 대립을 하고있었으니.
미소 양국이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처음엔 모두가 반대하였지만 나중에 좌익은 소련의
지령으로 찬성했다. 이때문에 민족의 비난을 받았다.
여러 정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미소 간 회담이 난항을 겪는가운데 1946년 여름
정읍에서 이승만 박사는 남한의 우선먼저 선거를 주장했다.
그것은 두말할것 없이 당시 우리 민족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남한의 우선 선거 아니면 유일한 대안은 북한에 항복하고 공산화 통일되는것 뿐이었
으니 선견지명에 냉철하고 현실주의 적이었던 지도자 이승만 박사 그는
당시로서 이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보았고 앞일을 미리 내다보았던 그는 옳았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선택이었다. 당시 김구 를 비롯한 민족 일각에서 이를 반대
통일을 우선 주장했고 좌익진영은 이를 맹 비난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과 인사들은
이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알았고 국민과 대부분 지도자들은 이승만씨의 주장을
지지 했다.
당시 남한 주민 여론도 이승만씨 구상에 대한 찬성의견이 압도적이었으며 반면 김구
의 생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47년 유엔 결정하에 남북한 총선거 구상이 유엔에 의해 발표되었으나
소련과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앞장서서 이를 거부했으니 그것은 곧 통일민족국가 수립에서 민족 대다수가 지지하지 않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수 없었기때문이며
인구에서 두세배 이상 우위인 대한민국(남한)에 먹힐것을 우려했기때문에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하려는 소련의 음모 그리고 북한에서 독재 권력을 노리던 김일성 집단의 야욕이 일치한 결과 였다.
이미 소련은 동독을 비롯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지역을 공산화하여 소련의 점령하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또한 이들 처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려는 소련의 야심의 일환이었다.
반면 미국은 서유럽과 함께 한반도 그중 남한 지역과 일본을 지키기위해 맞섰다.
특히 중국대륙이 공산화하면서 미국은 대만 역시 방어를 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소련과 북한의 거부로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당시 김구 등 우익 일부 인사들이 불참하고 공산분자들이 총선을 방해하기위헤
곳곳에서 폭력사태를 일으켜 총선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국민 대다수 가 참여
90% 이상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국민들의 뜻은 이미 이승만 박사와 같이 하고
있었던것이다. 당시 총선을 방해하던 좌익 즉 총선방해는 즉 대한민국 탄생을
막기위한 공산분자들의 발악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총선거에 적극 참여했다.
이미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세력들 이 섬에 잠입하여 4월 초부터 대대적으로 총선 방해를 위한 도민들의 투쟁을 선동했고 도민들 대다수는 공산분자들에게 이용당하여
그들 선전에 속고 있었다. 당시 육지와 떨어져 정보 소통이 부재한 제주도에서는
그만큼 무지랭이가 많아 공산당세력이 도민들을 선동하는데 적극 나섰고
대다수 도민들은 공산분자들을 지지한게 아니라 그들의 선전에이용당한 것이다.
오늘날같으면 제주도민들은 공산당원들에게 속지 않았을것이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 건국을 방헤하려는 공산당 좌익의 책동이자 음모인줄도 모르고
도민들은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그들에게 놀아난것이 사실이다.
제주도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군경이 과잉 진압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도민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것이 결국 제주 4-3 사태로 발전했다.
이것을 공산 폭동으로 혹은 애국 항쟁으로 모두 보아선 안된다는 점이다. 대다수 도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고 아무것도 모른채 이용만 당헸으며 또 이들은 공산당에게 놀아난것이다. 결국 이것을 북한에서는 지금도 제주 도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기위해 일어선것처럼 선전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제주 도민들의 사태를 마치 이승만 정권에 맞선 애국 항쟁으로 미화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이라는것을 알아야한다.
선거와 정부 수립후에도 제주 사태는 계속되 총 반년간 이어지다가 결국 군경의 강제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채 막이 내렸다.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불명예는 당연히 벗겨져야한다. 또 그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매도해서도 안된다. 단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남로당 공산분자들의 실체 역시
바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제주 사태를 항쟁으로 미화해서 안되는 이유는
이들이 아무리 순수했다해도 결과적으로 공산당들에게 들러리로 이용당한것은 사실이기때문이고 단 억울한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진상 규명은 있어야한다.
1948년 5월10일 총선에서는 이승만 진영이 압승하여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진 주로 한민당 및 일부 무소속이었으며 김구의 총선 불참에도 불구하고 김구 지지자 일부 역시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대다수 당선자는 친 이승만 계열이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1948년 7월 헌법 공포에 이어 8월 15일 해방 3주년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 유엔과 세계는 한국을 승인했다. 유엔에서는 46 대 6 압도적 차이로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당시 소련과 그 속국들만 반대표를 던졌다.
(반대 6개국은 소련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 루마니아 불가리아)
하지만 북한은 그해 9월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마침내 공산정권을 선포함으로써
결국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는 분단되 두개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북한은 소련의 꼭둑각시 정권으로 공산 정권이 들어서 이질적으로 변모했고 남쪽엔
미국과 세계의 지원을 받는 자유민주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남로당은 불법화되 남쪽에서 공산당은 더이상 활동이 금지되고 박헌영 등 공산당 수뇌들은 북으로 넘어가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남쪽에 잔류한 공산분자들은 게속해서 여수 순천 대구 등 곳곳에서 폭력과 내란을 일으켰으나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시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먼저 총선을 통해 건국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라.
대한민국은 탄생을 해보지도 못한채 혼란과 내전 속에 결국 한반도 전체가
공산당에게 먹혀 적화통일이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이를 알고 있었다. 다만 일부가 이를 이해 못했을뿐이다.
김구 선생이 북에까지 다녀오는등 애국자 열정은 이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현실을 이해 못하신것은 그가 이상주의자로 실패한 지도자 였음을 입증한다.
무조건 현실보다 이상만을 추구한것이 당시로서 얼마나 무모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는가
그런점에서 김구 선생의 애국정신은 인정하지만 당시 현실속에서는
이승만 같은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력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가 김구처럼 이상주의 에 치우쳐 고집한 지도자 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이승만을 지지하건 안하건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고 있다.
김대중 씨 조차도 이승만의 현실적 냉철함 과 김구의 실패한 이상주의를 인정한바 있다. 김대중의 두 지도자 평가 편에서.
민족 반역자 김일성은 김구 선생을 평양에서 맞을때도 오로지 그를 이용하기위한 생각뿐이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결국 공산당에게 또 한번 속은 김구 선생은 쓸쓸히 서울로 돌아오시는데
1948년 대한민국 탄생과 함께 각종 폭력사태 그리고 공산당에 의한 정판사 사건 등
그리고 국회에 일부 프락치들이 즉 일부 의원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로 활약하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고 송진우 씨 에 이어 여운형 그리고 장덕수와 김구 선생이
차례로 암살되었다. 장덕수의 암살범은 좌익으로 밝혀졌으며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그 배후가 이승만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안씨 단독 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에서도 좌우익 합작을 추진하던 현준혁이 김일성의 사주로
암살되고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이 기어이 공산군에게 채포되 동란중 처형된것으로 알려져있다.
김규식 남궁억 등 많은 요인들이 동란때 북으로 납북된것은 가슴아픈일이다.
다음은 육이오 동란 편 (다음에 계속함 많은 필독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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