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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 5 공화국 후반 즉 1985년 2월 총선부터 1987년 대선까지 정치야사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12대 총선
당시는 중선거구 제로 92개 지역구 각 지역구에서 두명씩 선출하고
나머지 92명은 비례 대표(당시 전국구로 불림)로 선출
즉 금메달 은메달까지 당선되고 3위는 낙선 그리고 비례대표는 5 % 이상 득표한 정당에 한해 그중 1당엔 3분의 2(61명)을 배분하고 나머지는 5 % 하한선에 득표율로 배분
민정당 (민주 그리고 정의당 약자)은 집권당으로 지역구 87명 비례 61명으로 148명으로 과반수 확보
새로 급조된 신한민주당 은 지역구 50명 비례 17명 총 67명
기존 제 1 야당이던 민주 한국당 지역구 26명 비례 9명 총 35명
한국 국민당 지역구 16명 비례 5명으로 총21명
그외 신사당 신민주당 각 한명씩 무소속 3명 총 276명 당선.
이것이 총선결과 였다.
우선 민정당은 비록 과반수를 얻었지만 대도시 서울 부산 대구에서 모두 5석 즉 지역구에서만 5명이 낙선했다.
민한당은 총선전 71석에서 그 절반수준으로 토막났고 대신 신민당이 급조된지 한달만에 대도시를 휩쓸며 67명으로 제 1 야당이 된다.
국민당은 간신히 교섭단체에 필요한 20석을 넘겼다.
이중 신민당은 민한당 당선자 30명 국민당 당선자 3명 무소속 한명
신사당 신민주당 각 한명씩을 총선후 입당시켜 총 103석의
야당사상 최대 의석을 갖게 되었고 반면 민한당은 3명으로 줄어
사실상 침몰 했다. 국민당은 3명을 신당에 빼앗긴 대신 민한당 당선자 2명과
무소속 당선자 한명을 영입해 21명을 유지함
이후 신민당의 계파를 보면
김영삼(상도동계) 김대중 (동교동계) 즉 양김 계 가 70여명으로 주류를 차지한 가운데
비주류인 이철승 신도환 김재광 이기택 기타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주류측 대리인으로 이민우 씨(종로 중구 당선자)를 신민당 간판 총재로 임명했으나 사실상 신민당 두 실세는 양 김 이었다.
1985년 여름 12대 국회 개원된지 한달여만에 김녹영 의원(국회 부의장 광주 출신)이 작고하여 당시 보선이 없었기에 신민당은 102석으로 줄어들었다.
민정당 역시 12대 임기중 한명이 사망 147명이 되지만 나중 무소속 야당 일부를 영입하여 의석을 늘리게 된다.
민한당까지 사실상 흡수하여 거대한 야당이 된 신민당은 그러나 계파간 해묵은 싸움으로 분열 내분을 극복하지 못했다.
즉 전두환 정부 5공화국 집권 민정당하고 싸우면서 신민당 내분까지 겪었던것이다.
태생때부터 신민당 한계였다.
1985년 10월 비주류인 김옥선의원, 조연하 의원이 주류에 반기를 들고 항명 이때문에 징계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신보수회에 가입한 10여명의 의원들이 주류측과 양김을 반대하며 시비를 했고
결국 신보수회 소속의원 12명 (유한열 정재원 이태구 임종기 최운지 신경설 유갑종 황병우 서종열 한석ㅂ봉 이건일 신병열)
이 1985년 12월 말
신민당을 집단 탈당하여 신민당은 90석으로 준 가운데 탈당한 12명은 양김을 맹 비난하고 이듬해 민중민주당을 창당하고 이들은 민정당과 더불어
내각제 개헌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후에도 신민당의 주류 비주류간 싸움은 계속되고 특히 비주류는 양김을 독재자로
부르며 신민당의 독주를 걸고 넘어졌다.
1986년 9월에는 정풍회가 조직되 이택희 이택돈 박한상 박해충 의원 4명이 참여했고
이들은 양김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들은 다른 비주류 중진들 즉 조연하 김옥선 김재광
신도환 이철승의원들하고 함께 민주연합을 만들어 주류와 냉전을 계속 했다.
한편 1986년 이해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을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재 개헌을 주장을 하며 줄다리기를 계속한다.
그러던중 1986년 말 당시 신민당 총재 이민우씨가 이민우 구상을 독자적으로 발표하여 정부와 타협할 생각을 비쳤는데 이것은 이 총재가 양김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시도를 하며 독자적으로 내놓은 구상으로 주류와는 전혀 합의가 없었고
그래서 주류는 반발하며 이를 철회히도록 압박을 가해 이 총재는 일단
이 구상을 철회 했지만 이때부터 비주류 연합의 지원을 받은 이 총재 측과
양김 주류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7년 2월 이철승 의원이 내각제 지지 발언을 했다.그의 평소의 소신이다그래서 놀
랄일은 아니지만 주류는 이를 의도적 해당 행위로 간주 징계를 시도 했고 이어 정풍파
수장 이택희 의원이 주류에 맞서 김영삼 씨의 당권 개입 정지 가처분 신청한것에 대해
주류는 경악했다.
이철승 이택희 의원에 대한 징계마저 비주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민우 구상은 다시 살아나 또 한번 신만당은 내분에 빠졌다.
급기야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1987년 4월 양김은 신민당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로써 신민당 의원 90명 가운데 70여명이 탈당 양김이 이끄는 통일 민주당에
참여하고 신민당 은 20명이하의 작은 야당으로 침몰했다.
그나마 신민당에 잔류했던 김재광 박한상 조연하 의원등 일부 의원들도 탈당하고
이기택 계는 역시 탈당했다. 신민당은 이민우총재 이철승 이택희 이택돈 신도환 김옥선 김한수 김병수 신달수 박해충의원 등 열명하고 민중민주당 ( 신보수회)을 합친
20여명으로 간신히 유지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개헌을 보류한다고 발표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이는 야당 측 반발을 샀고 5공화국 헌법에 의한
간선제(이른바 체육관 대통령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방침에 시민들도 반대하였다.
19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는 노태우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같은날 거리에선 야당 주도 규탄 대회가 열렸고 이것이 전국적 민주화 시위와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고 연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조각에 맞아 결국 사망했다.
두주일간 시위로 전국이 혼란한 가운데 결국 여야간 대화는 재개 되었고
고심끝에 6월29일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 수용 등 일련의 조치를 발표하여
문제가 해결실마리를 찾았다.
7월에 김대중씨는 사면 복권되 출마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을에 접어들며 양김은 대선후보 를 놓고 갈등에 부디쳐 결국
김대중씨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분당을 맞게 되
제 1 야당은 반년만에 또 한번 분당을 겪게 되었다.
양김이 독자 출마를 기정 사실화한 가운데 김종필 구 공화당 총재가 등장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어 3김 시대가 부활하고 대선에 들어갔다.
글고 1987년 12월 대선은 노태우씨가 37 % 를 득표 하고 김영삼 28 % 김대중 27 %
김종필 8 %로 결국 우여곡절끝에 노태우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6 10 항쟁으로 수세에 몰린 여당이 반년만에 극적으로 반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야당은 투표로 선출된 노태우 정권을 무조건 반대할 명목이 없어졌고
단일화 실패에 따른 책임까지 안게 되 양김의 시련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