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선 필자는 대한민국 건국일을 1919년 3월 1일로 하는것에 찬성한다. 글고

 

1945년은 건국이 아닌 국토 회복의 해 그리고 1948년은 대한민국이 조국을 되찾고

 

처음으로 정부를 세운 정부수립의 해 로 보아야한다. 건국과 정부 수립은 별개다.

 

즉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정부 수립의 해는 각각

 

별도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건국은 1919년(대한민국)  1948년은 국가회복의 해

 

로 하도록 한다. 그리고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해야만이 북한넘들이

 

그들의 정통성을 주장할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 애국가

 

대한국호는 1919년에서 따온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국가의 정통을 주장할수 없다.

 

여기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국부로 인정해야마나 하는 논리 이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며 특히 진보 야권 은 그를 독재자라 부르며 국부로 칭하는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독재와 건국공로는 별개이다. 독재를 했다해서 국가를 세운 공로를

 

부인하는것은 옳지 않다.

 

누가 세운나라인가 이나라를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피를 흘렸던가

 

그런데 정작 젊은 철부지 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고 심지어 경인여대에서

 

동상 건립마저 반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하대 경인여대는 모두 이승만 박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들이고 절대로 좌파들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선 안된다.

 

친노 좌파 문재인 집단은 말할것도 없고 국민의 당 내부에서도 박지원 천정배 등

 

골수 진보 좌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부르는데 딴지걸지 말아야한다.

 

 

단독정부 수립이 과연 잘못된 결정인가

 

만일 이승만박사께서 단독 수립론을 철회했다면 과연 통일이 쉽게 이루어졌을까

 

아니다. 설령 이승만박사께서 그렇게 했다해도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하고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소련이 기어이 남북한 통일을

 

방해하고 북한은 기어이 단독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만일 그 상황하에서 끝까지 김구의 주장대로 했더라면 대한민국은 건국되기도 전에

 

북한의 전쟁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을것이다.

 

김구 선생의 애국열정이 아무리 훌륭하다해도 현실적인것이 아니었기에 현실을

 

직시하지못한것은 결국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김구선생은 불운하게도 그 열정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었던것이다.

 

김구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 마저 그의 생각에 반대하고 그를 떠나갔다.

 

만약 그 상황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다면 결국 남한전역이

 

김일성에게 먹혔을것이고 결국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았을것이다.

 

그런점에서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 수립론이 가장 현실적 대안이었음에도

 

지금도 좌파 진영에서 이를 왜곡하고 악평하고 있으며 이승만땜에 통일이 안되고

 

분단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 책임이라느니 막말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작 분단의 원흉은 소련하고 김일성 집단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아니면 공산화 둘중 하나를 택할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국 가장 합리

 

적인 현실적 방안은 전자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통성을 폄훼하는 좌파 학계의 검정교과서가 다시 등장하면 정말

 

불행한 일이 될것이다. 교과서 국정화를 막으려는 저들의 음모를 파악하자.

 

 

김구 선생의 북한 방문은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가

 

그 분의 열정과 애국심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분명 실패한 결정이었다.

 

김구를 평양에서 맞는 김일성의 머리속엔 무엇이들었을까

 

통일의 관심조차 없던 그는 김구선생을 이용만 하고 보냈다.

 

김구 선생은 임정 주석때 공산주의자들에게 속은 적이 있어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지

 

만 마지못해 북한을 방문했으나 결국 김일성은 그 요구를 거부했고 심지어

 

김구 선생이 요구한 조만식 민족 지도자 석방을 거부했다.  김구 선생은 조만식 선생

 

을 석방하면 자기가 남쪽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으나 김일성은 거부했다.

 

 

소련은 2차대전 끌날무렵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하여 소련의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

 

고 그 일환으로 북한에도 역시 같은 공산독재정권을 수립한다.

 

미국은 이에 맞서 서유럽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원조를 단행하고 남한을 지키기위해

 

38선을 제안 결국 분단이 시작된다.

 

독일은 분단되어 동독엔 친소 공산정권이 서독엔 친미 자유민주정권이 들어서지만

 

독일이 한국과 달리 동족간 전쟁을 치르지 않은 이유는 당시 동독에만 소련군이 40만

 

여명 미군은 서독에 30만 여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나토와 바르샤바 군사동

 

맹으로 미소 등 동맹군들이 언제라도 개입할수 있었다. 그래서 동독이 서독을

 

침공하는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북한은 달랐다. 그들은 20만 병력을 증강시키고

 

소련의 원조아래 군사력을 강화했다. 소련군은 1948년 북한 주둔군을 철수시키면서

 

북한에 무기 원조를 강화했다. 게다가 중공으로부터도 조선인 병력을 넘겨 받았다.

 

이무렵 2차대전이 끝난직후 일본은 미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면 한반도는 남하고 북으로 갈라서 38선을 통해서 미 소 군이 각각 주둔하게 되었다.

 

즉 일본은 소련군이 진주하기전에 미군이 재빨리 일본 열도 전체를 장악할수 있었지

 

만 한반도는 소련하고도 접경하여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진출이 가능했기에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빼앗길것을 두려워해 38선을 제안 하고 소련은 이를 수용했다.

 

그리고 중국은 국공내전끝에 공산군이 본토를 장악하고 국부군은 본토 밖의 섬으로

 

철수했다.

 

미국은 1949년 주한미군을 철수시켰고 대한민국 국군은 병력이 보잘것 없었다.

 

미국의 원조 도 한계적이었고 더우기 미국무장관 발언을 통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

 

선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소련의 지시아래 남침을 명령

 

전쟁이 일어났고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난것이다.

 

동족 상잔의 범죄를 저지른 북한의 죄악은 민족이 규탄을 한다.

 

하지만 미군의 개입 유엔의 지원으로 한국은 반격에 성공 한때 는 낙동강까지밀렸던

 

아군이 3개월만에 180도 반전하여  압록강 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했으나  1951년 봄이 되자 서울을 되찾고 적을 38도선 지

 

역으로 밀어냈다. 이후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고지전이 계속되다가 1953년 7월27일에

 

한국의 불참속에 유엔과 공산측 간 합의로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막이 내려

 

지금까지 한국전은 휴전중인 전쟁이며 아직도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64년 이라는 세계 가장 긴 휴전으로 기록에 오른 전쟁이다.

 

대한민국은 발전을 했고 북한은 김일성이후 3대에 걸친 세습독재가 계속되고 있다.

 

기존의 38선은 휴전선으로 대체되며 개성 과 황해도 옹진 연안 등이 북으로 넘어갔고

 

(다만 백령도 대청 소청 등의 도서들이 남한으로 남아있다.)

 

반면 경기도 연천 과 강원도의 철원 고성 속초 일대는 수복되어 대한민국에 편입된다.

 

현재 경기도 개성 및 강원도의 통천 회양 평강 이천 그라고 철원군과 고성군 북부 일

 

부 지역은 북한에 남아있으며 설악산은 수복되었고 금강산은 여전히 북한의 강원도에

 

편입되 있다.

 

북한은 1950년대에 무자비한 숙청으로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거물들을 처형하고

 

이어 소련파와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자행하여 그나마 한때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들이었던 박헌영 허가이 김두봉 등 이 처형 또는 숙청 되었고

 

많은 이들이 망명을 했다.

 

1960년대초 주체사상을 창시한 장본인이자 학자 출신으로 김일성대 총장을 지낸 황

 

장엽씨도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 남북한의 주사파들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황씨는 북한 김정일 정권의 악행과 만행을 고발하여 세계로부터 공감을 샀지만

 

북한정권은 그를 죽이기위해 암살단까지 남파시켰으나 체포되었다.

 

들리는바에 의하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좌파 정권은 그를 부담스럽게 여겨 그의 반

 

북 활동을 제한하려 했지만 반발을 사게 된다.

 

황씨는 2010년 망명 13년만에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